교육에 관한 적극적인 요구는 우리 사회의 가족형태까지 변화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기러기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2001년 즈음부터 자녀의 성공적인 유학을 위해 엄마와 자녀가 동반유학의 길을 떠나고 아빠는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에 남아 생계를 책임지는 가족의 형태를 ‘기러기 가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기유학 열풍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지난해 기러기 아빠의 자살소식이 여러 건 들려오면서 이들에 대해 비판과 동정이 엇갈리고 있다.
매년 1∼2만명 ‘기러기 아빠’ 생활 “이틀에 한번 꼴로 전화통화를 하고, 틈날 때마다 화상채팅으로 아들과 아내를 만납니다. 그래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회사 일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기러기 아빠 생활이 생각만큼 힘들지도 않고요. 매일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을 하면서 아내 없는 외로움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회사원 김모씨(40)는 기러기 아빠가 된 지 7개월째다. 처음에는 10살 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아내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 해방감도 들었다. 그러나 동료들과 퇴근길에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쌓였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말했다.
11살 때 엄마와 함께 캐나다로 떠난 딸이 어느덧 15살이라는 이승원씨(44). 영어학습뿐 아니라 아이 나이에 걸맞게 즐기면서 성장기를 보내도록 만들어 주고 싶어 결정을 내렸다. 그는 1년에 고작 2∼3번 만날 뿐이라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일에 파묻혀 지낸다고 했다.
“아이가 현지에서 혼자 생활할 정도로 컸기 때문에 올해는 아내와 합칠 생각입니다. 아이도 엄마와 아빠가 함께 살기를 원하고요. 3년째 되던 해에는 혼자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더군요. 떨어져 사는 동안 아내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아요.”
교육인적자원부의 2000학년도 출국학생수 현황에 따르면 초등학생 1만640명, 중학생 5974명, 고등학생 3531명 등 2만145명이 해외이민이나 유학을 떠났다. 2002년 한해에도 1만5천 명 가량의 초등학생들이 출국을 이유로 자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 몇 년 전부터 떠난 학생들까지 포함한다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이하의 조기유학생은 이제 1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적어도 1년에 1∼2만 가구의 기러기 가족이 양산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국외유학에 관한 규정’을 보면 자비유학을 할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을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거나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 유학가능 연령을 공식적으로 낮추기는 했지만 사실 초등학생의 조기유학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초등학교 3학년생부터, 캐나다는 초등학교 1학년생부터 유학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맞물려 가족이 모두 이민을 가거나 부모 중 한 명이 한국에서 돈을 버는 ‘기러기 가족’형태가 늘어나는 실정이다.
부부 신뢰 깊어야 ‘이산갈등’ 줄어
애초 기러기 아빠는 아이들만 유학을 보냈을 때 생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드러나면서 나온 대안이었다. 조기유학을 떠난 아이들이 공부는 뒷전이고 유흥에 빠져 마약에 손을 댄다든지, 한국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이다 보니 영어 때문에 간 유학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정책, 엄청난 비용의 사교육비, 천편일률적인 학교교육 등 교육제도에 대한 불신이 작용해 직업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러기 아빠를 자청하고 있다. 이제 주변에서 기러기 아빠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게 됐다.
그러나 가족이란 부딪히고 뒹굴면서 정을 쌓아가야 하는데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다 보니 간간이 기러기 아빠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작년 7월에는 아내와 자녀를 캐나다로 유학 보낸 36세 기러기 아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다가 이를 눈치챈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비관자살한 것. 그로부터 3개월 뒤에는 아내와 딸 둘을 캐나다로 보내고 혼자 사는 40대 기러기 아빠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도 있었다. 전문가들이 꼽는 기러기 가족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살아 사고방식이 바뀌다 보니 가족간에 벽이 생기고 갈등을 겪는 점이다.
기러기 아빠들은 혼자 살다 보면 갖가지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혼자 생활비를 책임지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는 일도 만만치 않으며, 불규칙한 식사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거나 외로움으로 인한 갑작스런 돌연사도 염려스럽다.
가족의 소중함 등 긍정적 변화도
“기러기 가족은 한시적으로 해체된 가족형태입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다 보니 부부끼리 교환할 공통분모가 줄어들어 정서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부부 각자 성적 욕구를 해소할 출구가 없어 버거워하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버지 자리가 비니까 자연히 멀어집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잘 극복하려면 기러기 아빠가 되기 전부터 가족간에 신뢰를 쌓고 관계를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9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는 채규만 교수(성신여대 심리학과)는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는 부부,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빠일수록 가족간에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결국 정서적으로 가정 안의 평등함을 인정하며, 각자 맡은 역할에 우선권을 둔 부부일수록 서로 떨어져 살아도 적응을 잘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사춘기라서 그런지 자주 반항을 해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유학을 간 뒤 이메일을 매일 주고받다 보니 아들을 이해하게 됐지요. 한국에 있을 때는 이렇게 아들과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거든요. 아내도 자주 못 보니까 되도록 싫은 소리는 안 해요. 오히려 격려의 말을 많이 하게 돼 정이 깊어졌어요.”
증권사 지점장 박승택(43)씨. 14살 된 아들과 11살 된 딸이 아내와 함께 뉴질랜드로 떠난 뒤 꼭 1년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아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아내의 긍정적인 면이 보이더라는 것. 그래서 지금은 어떤 일이든 아내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됐다. 평소 말다툼이 많았던 아들과도 관계가 호전됐다고 한다. 실제로 2002년에 실시한 교수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자의 대부분이 기러기 가족으로 생활하면서 긍정적인 변화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내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절감해 부부관계가 이전에 비해 좋아진 것이다. 부부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면서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소수이긴 하지만 부딪힘이 많았던 친가와의 관계가 개선된 케이스도 있었다. 한국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기러기 아빠가 되기 전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족 모두 신중하게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기러기 아빠를 유행에 떠밀려 빚 얻어 선택하거나, 별거나 이혼을 생각하는 가족 포장수단으로 선택해선 안 되지요. 이곳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가족 갈등은 떨어져 살면 살수록 더 커지거든요”라며 아이의 의견을 무시한 부모만의 결정은 아닌지 꼼꼼히 점검하라고 충고했다. 덧붙여 강 소장은 성공적인 기러기 가족이 되려면 제일 먼저 가족전략을 잘 짜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 서로 꼭 지켜야 하는 약속과 규칙을 정하라는 것. 예컨대 돈이 좀 들더라도 잦은 왕래를 통해 가족의 정을 확인하거나 나름의 생활지침서를 만들어 놓고 부부와 아이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운동과 취미활동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법도 있다. 때론 ‘동병상련’의 심정을 함께 나눌 기러기 아빠 모임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언제쯤 기러기 아빠 생활을 청산할지 기간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외부에서 기러기 가족을 사회의 문제로 바라보고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별반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는 법이다. 가족과 살을 부비며 오늘 하루를 보낼 순 없지만 덕분에 평등한 가족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렇다고 기러기 아빠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증가추세에 놓인 기러기 가족을 새로운 가족형태로 받아들이는 넉넉한 시선이 필요할 뿐이다.
자료: 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