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한인사회에 변화물결 국제결혼, 유학 통해 '젊은 세대' 속속 유입

『날씨가 좋으면 남편과 나는 가끔씩 드라이브를 나간다. 우리 살림에 돈 안드는 취미생활이란 그것뿐이지 않은가. 드라이브를 하면서 남편은 나보고 남편 잘 만나 이런데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느니 너스레를 떨기도 하는데 우리는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되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 다운타운이 마주 보이는 시그널 힐(Signal Hill)에 올라가면 망망한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런던·몬트리올·파리를 향하는 화살표와 함께 그곳까지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이 표시판을 보면 여기는 지구상의 어디쯤 되는가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곳은 중학교 때 지리시간에 배웠던 세계 4대 어장으로 유명한 뉴펀들랜드의 수도 세인트존스(Saint John’s). 북미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도시이다.』 이 글은 뉴펀들랜드한인회 회장인 김양임씨가 94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 한민족축전본부」 주최 「세계한민족 이민생활 수기」 공모에서 가작으로 입선된 「눈소리 바람소리」의 일부이다. 김회장은 공모 당시 뉴펀들랜드한인회의 재무를, 그의 남편 김기수 박사(메모리얼대 교수)는 총무를 각각 맡고 있었다. 그해 수기공모에 22개국으로부터 응모된 142편중에서 19편이 입선으로 선정됐다. 김회장 가정이 90년 세인트존스에 오게 된 것은 남편 김박사가 캐나다서부 에드먼튼의 알버타대에서 2년간의 강사생활 끝에 메모리얼대 교육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온지 8년만에 이루어진 정착이다. 81년이 다 끝나가는 어느 겨울날 남편이 알버타대로 유학을 떠났다. 학문을 계속하고 싶었던 오랜 세월의 소망이 실현됐다. 결혼한 뒤 6년 뒤였다. 그때 김회장은 인천의 모여고 역사교사였다. 8개월 뒤인 82년 여름 김회장과 두 아들은 에드먼튼에서 남편과 재회, 유학생 아내로서의 고생스러운 캐나다생활이 시작됐다. 남편은 석사와 박사과정을 끝내는데 4년8개월이 걸렸다. 전공은 교육철학. 영주권을 신청한 상태에서 86년 10월 토론토로 왔다. 2년을 기다린 끝에 영주권이 나오고 알버타대에서 강사자리를 얻게 되어 에드먼튼으로 되돌아갔다. 두 아들을 포함한 김회장 가정은 인구가 캐나다 여타지역에 비해 세월이 흘러도 크게 늘지 않는 뉴펀들랜드 한인사회의 귀중한 일원이다. 연년생인 장남 새날과 차남 새복은 메모리얼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나가 원어민 영어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올 연말 총회로서 2년간의 임기를 마치는 김회장은 두 아들이 한국에서 근무하는 것을 내심 기뻐하고 있다. 한국에서 며느리를 데리고 올 가능성이 한결 높아졌기 때문이다. 뉴펀들랜드에서는 결혼 적령기에 달한 미혼한인여성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근년 들어 뉴펀들랜드 한인사회의 구성원이 가장 크게 늘어나는 분야는 원어민 영어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한 뉴펀들랜드 출신자들의 배우자들이다. 이중 대표적인 인물이 현 한인회 총무인 이진영씨. 이총무는 원어민 영어교사로 한국에 나간 뉴펀들랜드 태생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98년 세인트존스에 오게 됐다. 이총무의 경우와는 달리 대개는 한국에 원어민교사로 나간 뉴펀들랜드 출신 남성과 결혼함으로써 뉴펀들랜드에 온 한인여성들이다. 그중 한 사람이 2년전 랜디 로울러(Randy Lowlar)씨와 결혼, 아들을 두고 있는 안순화씨이다. 세인트존스 일원에 안순화씨 등 6가정이 한인회 행사에 참석한다. 이총무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 및 언어연수생들과 접촉이 빈번하다. 이들중 상당수가 그를 통해 뉴펀들랜드에 오기 때문이다. 그는 컴퓨터회사에 근무하는 외에 뉴펀들랜드유학원(www.nfstudy.com)을 운영하고 있다. 이총무와 뉴펀들랜드 한인사회의 「터주대감」인 조정원 박사에 의하면 메모리얼대의 한국유학생은 박사과정 2명, 석사과정 3명, 학부과정 2명이다. 조기유학생과 단기언어유학생도 상당수 있다. 이들은 가끔 모여 농구게임도 하곤 한다. 한국에서 뉴펀들랜드로 곧바로 이민오는 가정은 드물다. 동양인 등 유색인종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자리가 적어 정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총무 자신도 처음에 와서 정착에 어려워 두 번이나 한국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실토한다. 뉴펀들랜드한인회를 10년 넘게 적극적으로 도와온 기업이 있다. 세인트존스와 이웃한 도시 패러다이스(Paradise)에 있는 플라스틱 창틀제조회사 「에이컨 윈도우스(Acan Windows Inc.·1641 Topsail Road)」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한화석유화학이 설립한 이 회사는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재정지원을 해왔다. 금년 46세인 권태윤(Ted Kwon) 사장은 이곳 한인회의 중추적 인물중 한 사람. 설립 당시인 90년초에 불황으로 고전했으나 90년대 후반부터는 기술혁신과 더불어 시장이 호전되어 성장가도를 걷고 있는 에이컨은 뉴펀들랜드한인회와 메모리얼대 한인학생 및 언어연수생들의 모임을 지원하는 등 지역사회 유대관계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서강대 경제학과 출신인 권사장은 에이컨에서 두루 업무를 익힌 인물. 91년도 공장설립과 동시에 이곳에 온 그는 10개월 후 미시사가에 있는 온타리오공장으로 전근, 그곳에서 6년간 재정담당으로 있다 98년 6월에 뉴펀들랜드로 돌아와 총지배인으로 활동하던 중 정병진 사장이 서울로 귀임함에 따라 사장으로 승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가 사장이 된 후 판매실적이 매년 5%씩 늘어 근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70만∼80만개(가격으로는 약 1,500만달러). 원자재를 직접 생산하는 이 회사는 기존의 플라스틱 창틀에 이어 금년 4월에 스틸창문 조립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뉴펀들랜드 창틀수요의 약 30∼40%를 점하는 에이컨의 종업원수는 오피스직원 5명 등 연평균 70명. 이중에 한인은 권사장이 유일하다. 이 회사는 이제는 한국기업이 아니다. 소유주인 한화석유화학은 본국 IMF 사태와 해외사업 축소계획으로 93년에 설립된 미시가사공장을 99년 6월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했으며 지난해 7월 세인트존스 공장마저 매각했다. 세인트존스 공장의 새 오너는 토론토의 캐네디언 사업가. 새 오너는 회사경영은 권사장에게 맡기고 수개월에 한번씩 현지를 방문한다. 권사장은 자신이 뉴펀들랜드한인사회 회원증대에 톡톡히 일조했다며 자랑한다. 결혼 12년만인 98년도에 가진 첫 아이가 이번 9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뉴펀들랜드한인회의 구성원은 세인트존스에 몰려있다. 세인트존스를 벗어난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가정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이다. 세인트존스 외에 거주하는 한인중 대표적인 케이스는 세인트존스에서 서쪽으로 약 80km 컨셉션만(Conception Bay) 서쪽 70번도로 선상의 번창하는 타운 베이 로버츠(Bay Roberts)에서 백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민영기 목사 부부와 막내아들 윌리엄. 민목사는 ▲베이 로버츠의 센추럴(Central) ▲콜리스 포인트(Coleys Point)의 그레이스(Grace) ▲쉬어스타운(Shearstown)의 트리니티(Trinity) 등 3개의 연합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인구 약 6천명의 이 지역의 3개 연합교회 교인수는 약 500가구. 숭실대 졸업후 75년도에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주의 바이블 칼리지로 유학온 그는 몬트리올을 거쳐 81년도에 토론토의 임마누엘신학대학을 졸업하고 99년도에 낙스신학대학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은 직후 이곳에 부임하게 됐다. 지난 8월1일자로 이곳에서의 목회생활 5년차에 들어간 그는 이곳에 부임하기 전에 토론토의 만민교회에서 10년간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토론토에서 7학년을 마치고 이곳에 온 막내아들 윌리엄도 학교생활을 잘 적응하고 있고 성적도 우수하다. 지난해에는 지역내 불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민목사 부부 슬하의 자녀는 아들 3명과 딸 1명. 장남은 LA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이고 나머지 2명은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민목사는 막내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가 낯선 지역 동양인이라고는 중국식당 2곳밖에 없는 이곳에 와서 잘 적응하면서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물론 지역사회 봉사에 솔선수범하고 있는 것이 대견스럽다고 말한다. 찬양을 좋아하는 이순희 사모는 3개 교회의 여선교회에서 적극 활동하는 이 지역 중창단 멤버로 활약하고 있다. 민목사댁에 홈스테이(homestay)하는 한인유학생이 있다. 대학생들을 포함 한인학생 20명 정도 알고 있다는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나상일군. 이 지역에 한국유학생이 자신밖에 없어 유학 온지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영어실력이 부쩍 늘어 이곳에 잘 왔다고 말한다. 민목사 시무교회의 유일한 동양인이라고 말하는 그는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에 봉사하고 있다. 세인트존스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한인 중에는 보나비스타만(Bonavista Bay) 서쪽 작은 어촌 뉴타운(Newtown)에서 거주하는 유봉선씨가 포함된다. 유씨의 남편은 캐네디언으로 성공회교회 목사. 노바스코샤의 수도 핼리팩스에서 가정의를 하는 오빠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타운은 닥터 전용기씨가 오랜 세월 의술을 펴온 브룩필드(Brookfield)에서 북쪽으로 약 8km에 있는 마을. 테라노바국립공원 북쪽 도시 갬보(Gambo)에서 320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만나는 반도의 거의 끝 지역이다. 세인트존스에서 차로 약 6시간 거리에 있는 브룩필드는 이 지역의 전설적인 인물 닥터 전의 제2의 고향. 66년 10월부터 68년 1월까지 트리니티만(Trinity Bay) 동쪽의 반도의 끝 올드 펠리컨(Old Perlican)에서 근무하다 브룩필드로 간 때는 68년 2월. 그는 95년 은퇴할 때까지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브룩필드병원의 원장으로 의술뿐만 아니라 인생상담까지 하고 가톨릭교회의 사목회장까지 지내 이 지역에서는 추앙받는 인물이 됐다. 닥터 전의 이같은 헌신적인 봉사는 이 지역을 넘어 뉴펀들랜드는 물론 캐나다의학계에서도 알려졌다. 87년도 뉴펀들랜드의사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가정의」에 이어 다음해에는 동양인 최초로 캐나다전국의 「올해의 가정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닥터 전과 그의 부인 임숙규씨는 은퇴 후 세인트존스로 이주, 90년도에는 뉴펀들랜드한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닥터 전 부부는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41세인 장남 문호(Paul)씨는 세인트존스에서 서쪽으로 570km 떨어진 스프링데일에서 가정의(이곳에서는 「general practitioner·GP」라고 부른다) 근무하다 1년반 후 세인트존스로 돌아와 X-레이 전문의로 헬스 사이언스 센터(Health Science Centre)에서 근무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 장교생활을 하다 현재는 컴퓨터계통에 종사하고 있다. 셋째는 딸로 결혼해서 남부온타리오 채텀에서 음악교사를 하고 있다. 넷째는 아들로 리자이나에서 X-레이 전문의로, 다섯째는 오타와병원에서 연구원으로 각각 근무하고 있다. 뉴펀들랜드에 거주한 최초의 한인은 조정원(73) 박사.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53년도에 토론토대로 유학와 5년 후인 58년 9월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사학위 받은 직후 메모리얼대 교수로 발령을 받아 세인트존스로 이주했다. 96년도에 은퇴하고 명예교수로 남아있다. 조박사는 대학에 정년이 가까워오면서 한인사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89년도와 99년도 두 차례에 걸쳐 뉴펀들랜드한인회장을 역임했다. 이외에 89년 뉴펀들랜드한인회장 시절 캐나다한인총연합회 6대회장에 피선되어 한인총연합회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는 89년 총연합회 총회를 마련할 자금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세인트존스에서 총회를 할 수 있도록 주정부와 연방정부 자금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한인 비즈니스지도자들을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는 핑계로 총회도 겸했다. 그같은 공로로 총연합회 회장에 피선됐다. 그는 총연합회장을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정부기금을 얻어서 심포지엄과 미팅 등 6회 정도 했다. 캐나다소수민족협의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조박사는 일본계 3세인 부인과의 사이에 딸 2명을 두고 있다. 메모리얼대 물리학 석사와 토론토대 박사학위를 가진 큰 딸 영숙(캐롤린)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biochemistry), 둘째 딸 영혜(로블린)은 미국 덴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모두 미혼. 뉴펀들랜드에 두번째로 발을 디딘 한인은 세인트존스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는 닥터 김득추(73)씨. 평안북도 서천출생으로 해방 후 월남,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59년도에 뉴욕에 와서 의사트레이닝을 받던 62년 12월6일 뉴펀들랜드정부의 의사모집에 응해 세인트존스에 도착했다. 뉴펀들랜드주 가정의담당 부서에서 26년간 근무하다 은퇴하고 지난달까지 정신과병원에서 4년간 가정의로 근무해왔다. 닥터 김은 자녀가 있는 노바스코샤 핼리팩스로 이달중 영구히 떠난다. 말년을 자녀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그는 뉴펀들랜드출생 백인과 결혼, 아들 1명과 두 딸을 두고 있다. 자녀 3명 모두 노바스코샤에 거주하고 있다. 음악을 전공한 큰 딸 케리(Kerry McDonald)는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둘째 딸 클레어(Claire Karst)는 막내아들과 동업으로 치과의원을 개업중이다. 닥터 김은 20여년 전에는 한국여행을 비교적 자주 했다. 뉴펀들랜드 근해에서 조업하던 한국어선의 선원들이 입원하면 닥터 김의 거의 담당했고 어느 정도 치료되면 한국병원으로 후송하는데 동행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동행한 것이 18년 전이다. 뉴펀들랜드에서 오랜 세월 근무하다 타지로 떠난 한인들도 많다. 토론토의 의사 이재락(75) 박사와 핼리팩스로 간 전용주씨가 이중에 포함된다. 토론토에서 내과의사로 활동중인 이재락 박사는 63년부터 85년까지 뉴펀들랜드에서 거주했다. 그가 뉴펀들랜드에 간 것은 63년 7월. 당시는 지금과 같은 이민제도가 없어 장관허가증을 휴대했다. 도착한 다음해 영주권과 내과전문의 자격증을 얻었고 이후 왕립의학원(Royal College of Physicians of Ontario)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닥터 김덕추씨와 서울의대 동기생인 이박사는 세인트병원에서 1년간 근무 후 뉴펀들랜드의 중부지방 도시 그랜드폴스(Grand Falls)에 거주하면서 내과과장·의료원장·뉴펀들랜드 메모리얼의과대 부교수로 봉직한 후 85년 토론토에 와서 코리아타운에 병원을 개업했다. 뉴펀들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서부의 코너 브룩(Corner Brook)에서 마취의사로 근무하던 닥터 전용주씨는 수년전에 뉴펀들랜드를 떠나 비뇨기과 전문의인 닥터 샘(Sam)이 근무하는 핼리팩스로 떠났다. 그의 딸은 민영기 목사의 근무지인 베이 로보츠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최근에 세인트존스로 이사했다. (글·사진 김운영 편집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