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코레아노’들 (1) ‘애니깽’의 후예 (상) '애니깽'을 아십니까

본 한국일보는 오늘(27일)자부터 6회에 걸쳐 쿠바의 한인사회에 대한 심층취재기사를 연재한다. 본보 김운영 사장은 시니어들로 구성된 실버선교팀의 일원으로 쿠바를 방문, 15일부터 22일까지 머물면서 한인후예의 살아가는 모습 등을 집중 취재했다. 냉전시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쿠바는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중남미 섬나라 쿠바의 한인이민 역사는 올해로 88주년을 맞이했다. 20세기 초 멕시코로 이민 간 한인 1천여 명 중 274명이 1921년 3월 마나티항에 도착함으로써 ‘쿠바 코레아노’의 이민역사는 시작됐다. 현재 쿠바 전역에 흩어져 사는 한인후예 인구는 쿠바한인총연합회에 의해 944명으로 집계돼있다. 이들 중 한국은 물론, 멕시코에서 태어난 사람조차 한 명도 없다. 전원 쿠바에서 태어나 한인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혈통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 이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척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포들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기사 A6면) ‘여기 엘보로에 1921년 이민으로 온 대부분이 쿠바 유일의 전통한인촌을 이루어 살면서 에니켕 수확에 힘쓰는 한편 고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는 한국학교를 세우고 교회와 한인회를 설립하여 우리의 전통문화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 후예들이 이 귀중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으며, 이 사업은 시애틀 한인연합장로교회의 도움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 글은 쿠바의 한인후예 944명이 거주하는 7개 도시 중 하나인 항구도시 마탄자스(Matanzas)에서 약 4km 떨어진 외딴 마을 엘보로(El Boro)에 세워진 ‘한국인 기념비(Memorial Coreano)’에 새겨진 비문이다. 이 기념비는 쿠바 한인선조들의 첫 정착지인 에네켄(henequen: 용설란) 집단농장이 있는 곳이다. 마탄자스교육대학 철학교수로 20년간 봉직하다 93년에 은퇴한 원로학자 마르타 림(Martha Lim Kim·한국명 임운희) 여사가 토론토에서 온 한인실버선교(Silver Mission)팀 14명을 엘보로 농장이 있던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올해 70세의 노령인데도 주중에는 복음주의신학교(Evangelical Seminary of Theology)의 사무처에서 비서로, 주일에는 마탄자스 중앙장로교회에서 시무장로로 봉직하고 있는 그는 이곳 식으로 분류되는 이민 3세다. 초기 이민사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버지 임천택(이민 1.5세대)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와 함께 이민선을 탔고, 어머니는 멕시코에서, 자신은 쿠바에서 각각 출생했다. 마르타 임은 ‘쿠바의 한인들’ 이라는 책을 저술한 장본인으로 쿠바의 한인이민 역사에 대한 권위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남편인 쿠바의 역사학자 라올 루이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이 책은 부친 임천택(에르네스토 림 유)씨가 남긴 글을 바탕으로 쿠바의 공공기록보존서의 자료들, 신문기사들, 초기이민자들과 후손들의 증언들, 1997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복사해온 자료들을 참고하여 한인이민사를 재구성했다. 임천택씨의 글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신문 ‘신한민보’에 한글로 기재되었다가 후에 ‘한인쿠바이민사’로 출간되었다. 스페인어로 쓴 이 책은 재외동포재단의 도움으로 멕시코 한인이주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말로 외대 서반반아어과 교수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 얼마 전(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공동저자인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슬하의 세 딸은 모두 출가했다. 마르타 임은 저자인 자신도 번역본을 한 권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기자가 쿠바를 떠나기 전에 필히 돌려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 마르타 임은 선조들의 흔적이라곤 초라한 가옥들만 몇 채 남아있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지난 역사를 열성을 다해 설명했다. 우리말을 전혀 못 하고 초보단계의 영어를 구사하는 그가 스페인어로 열심히 설명하면 신학교에 공부하러 온 한인선교사가 우리 일행을 위해 통역을 해주었다. “선조들이 경작하던 에네켄 농장은 독일인들이 와서 운영했어요. 저기 보이는 저 집이 선조들이 살던 곳입니다. 파란 색으로 칠한 저 문이 한글학교와 교회로 들어가는 곳이지요. 지금은 쿠바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워요. 그리고 저쪽에 보이는 저 집에서 한인후손 중 가장 부자가 한때 살았답니다. 물론 지금은 어디로 떠나고 없지만….” 에네켄이 심어져 있던 농장은 오늘날 폐허가 되어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다. 농장 옆 ‘한국인 기념비’를 둘러싸고 있는 어린 에네켄 여러 그루들이 지난날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애니깽’으로 불리는 에네켄은 헤너킨(Henequen)의 멕시코식 발음. 멕시코 원산의 다년생 초본으로 잎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열대식물. 우리말 이름은 잎 모양이 ‘용의 혀’ 같다 해서 용설란(龍舌蘭)이다. 에네켄을 원료로 밧줄과 로프를 만드는 일은 두 가지 공정을 거쳤다. 하나는 농업 공정이고 다른 하나는 공장 공정이었다. 한국인들은 농업공정에만 관여했다. 에네켄은 다 자라는 데 몇 년이 걸렸고 수확기에 이르면 잎의 아래 부분을 잘라내 잎에서 밧줄과 로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섬유들을 뽑아냈다. 인조섬유의 발달로 에네켄 경작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엘보로 마을은 헛간 형태의 집 10여 채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한인들이 살던 집들은 기본적 시설을 갖추지 못 하고 있었다. 전기도 상수도도 없었다. 벌판 북쪽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왔다. 초창기에 농장주인은 에네켄 잎을 세척하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던 창고를 주거용으로 내주었다. 농장주는 나중에 한인들에게 엘보로 동남쪽 외곽에 허술한 집들을 제공해 주었다. 이민역사 88년 1921년 멕시코에서 274명의 한인들이 증기선을 타고 사탕수수 노동자로서 쿠바를 향해 떠났다. 쿠바 이주 한인들은 당시로부터 16년 전인 1905년 5월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 에네켄 농장의 노동자로 들어왔던 1,030명의 한인들과 후손들의 일부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서류와 공식적인 국적도 없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지난 2003년 펴낸 자료에 따르면 이들 한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쿠바를 향해 떠난 지 닷새 후인 3월11일 쿠바 남쪽의 마나티(Manati)항에 도착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증기선을 타고 멕시코 유카탄의 캄폐체를 떠나 그해 3월25일 마나티항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있다. 후에 이주자 중 243명의 명단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 중 119명이 성인(48.5%), 158명이 남자(64.4%), 87명이 여자였다(35.5%). 또한 94명(38.3%)만이 1905년 한국에서 멕시코 배를 타고 온 첫 이민세대였다. 멕시코에 온 한인들은 1909년 4년간의 계약노동이 끝나고 에네켄 산업도 쇠퇴하면서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졌고 그 중 일부가 쿠바로 떠났다. 쿠바는 사탕수수 재배로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으나 한인 이민자들이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국제 설탕가격이 폭락하면서 쿠바경제가 추락하던 시기였다. 사탕수수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에네켄 재배가 시작되자 유카탄 농장에서 숙련된 한인들은 에네켄 농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에네켄 농장이 생겨난 마탄자스로 이주한 한인들은 엘보로 마을에 정착했고, 한인회(당시 명칭은 ‘한인국민회지방회’), 한인교회, 한글학교를 세웠다. 이를 통해 한인들은 정체성 유지를 위해 애썼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1) 애니깽의 후예(上) 88년前 멕시코서 집단이주 눈물겨운 생활 속 독립운동 지원도 전국 ‘한국계’ 944명…전원 ‘쿠바生’ 엘보로 한인촌 엘보로는 가장 중요한 본거지였다. 여기서 국민회 청년단, 여성회가 생겨났다. 전통악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전통음식이 일상 식탁과 명절날에 올라왔다. 일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조국에 대한 것들이 일상사와 함께 주된 대화 주제였다.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Cuba)의 회칙이 통과됐다. 국민회에는 한국 태생의 한인과 그 후손들이 가입했다. 국민회는 11명의 지도부에 의해 집행되었다. 이들 한인들은 독립자금을 모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1,289달러의 성금을 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냈다. 아울러 246달러를 따로 모아 상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주석에게 보냈다. 마탄자스에서 얻은 안정은 잠시. 일자리가 부족해지자 일부가 살길을 찾아 정든 엘보로를 떠나야만 했다. 일자리가 많은 카르데나스로 몇 가족이 이주했다. 마나티의 일부 가족들도 그곳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마탄자스, 카르데나스, 아바나 등 3개 지역에 한인 핵심 거주지가 생겨났다. 카르데나스 농장에 거주한 한인은 엘보로 마을의 예를 그대로 따랐다. 1927년 8월11일 그들의 국민회를 조직했다. 카르데나스의 지방회 모임은 마탄자스처럼 정규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쿠바의 수도에도 1943년 3월24일 한인회가 세워졌다. 마탄자스와 카르데나스의 국민회 지방회와는 달리 아바나의 한인회는 대한민국 임시망명정부의 노선에 반대하지 않는 쿠바 전역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들이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게 했다. 이 한인회는 샌프란시스코 북미 지방총회의 지사를 받던 마탄자스와 카르데나스 국민회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1944년 엘보로 농장이 팔린 뒤 마을 사람들은 곧 도시로 흩어져 버렸고 1945년 이후 쿠바내정의 변화로 한인단체들이 와해되면서 세대교체와 함께 정체성의 상실도 가속화되었다. 특히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남한과 미국의 한인회 등과 단절돼 전통적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이어가기 힘들게 됐다. 쿠바의 한인후예들은 대부분 비한인과 결혼하면서 뿌리를 잊은 채 쿠바에 동화되어 쿠바의 코레아노(Coreano)가 됐던 것이다. 김운영[woonyoung@korea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