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코레아노’들 (2) ‘애니깽’의 후예 (하) ‘59년 혁명’ 후 사회적 두각

차관 지낸 임은조씨 ‘카스트로동창’ 島山 사촌누이동생, 아바나에 생존 동부지방에 정착한 한인들은 가족 단위로 쪼개져 서로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민족적 뿌리를 찾는 힘이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러나 마탄자스와 카르데나스에 뿌리를 내린 한인들은 서로 뭉쳤고, 전력을 다해 실행 가능한 전통과 풍습을 붙잡을 수 있었다. 1950년대까지 젊은이들의 정식 속에 한국의 혼이 꺼지지 않도록 교육시키려는 열의가 지속됐다. 여성회도 만들어졌다. 1938년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여성단체의 권고로 엘보로(El Boro)에 여성모임이 결성되었다. 회원이 20명인 여성애국단체는 항일투쟁의 기치 아래 1945년까지 활동하면서 조국의 해방과 독립군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자금을 보냈다. 쿠바이주자들은 이민 초기부터 차츰 사회적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에네켄 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대다수 한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첫 시발점이었던 마티니에서 호세 리는 간호사가 되었으며 세월이 지난 후 저축한 돈으로 아바나에 여관을 세웠다. 라몬 박 가족은 쿠바에서 안경점과 보석상을 경영했다. 카르데나스에서도 마리아 김과 다미스 장은 각각 식당을 경영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은 아바나에 정착한 일부 한인들이었다. 로렌소, 에스테반 한, 알폰소 김은 직물에 손을 대서 성공했고 머누엘 리는 버스 2대를 소유했다. 로베르토 리는 가구를 제작하여 재산을 축적했다. 오늘날 쿠바의 코레아노들 중에 1959년 혁명 이후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부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 마탄자스종합대 철학과 교수였던 마르타 임은 “쿠바혁명으로 교육과 의료 부분에서 지난날과 같은 불평등이 사라진 다음부터 한인후예들도 교육과 취업의 평등한 기회를 더 많이 누리게 됐다”고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쿠바 한인후예 중에 가장 이름을 날린 집안은 마르타 임의 아버지인 임천택의 가문이다. 쿠바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97년에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기도 한 임천택의 장남인 헤로니모 임(Jeronimo Im·한국명 임은조)은 쿠바정부에 고위직에 오른 인물. 1926년 마탄자스 외곽 에네켄 농장에서 태어난 그는 대부분의 쿠바 한인들이 가난한 탓에 학교 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질 못 하던 시절, 고학을 하면서 아바나 법대를 다녔다. 같은 해에 법대에 입학한 카스트로와는 강의를 같이 듣는 것은 물론 시국토론과 시위에도 함께 참여했다. 쿠바혁명에 가담한 그는 산업부 관리로 들어가 산업부 차관을 지낸 뒤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을 마지막으로 98년 공직에서 은퇴했다. 혁명 바로 뒤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으로 있을 때는 관리부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보좌했다. 아버지 임천택은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85년 눈을 감았으나, 헤로니모 임은 남북한을 모두 방문했다. 67년 쿠바정부 관리로서 북한을 방문한 그는 여동생 마르타 임과 함께 97년 한국을 방문, 아버지의 국민훈장을 대신 받았다. 그후 2003년에도 재외동포재단이 마련한 유공동포 고국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방문, 쿠바의 한인 젊은이들이 고국을 알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78세였던 그는 쿠바한인회 회장이었다. 3대에 걸쳐 목회자를 배출한 가정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장천희(1920년생) 할머니의 큰아들인 데이빗 리 목사(Rev. David Lee Chang)가 쿠바의 개혁장로교단(Iglesia Christiana Reformada)의 교단장으로 쿠바의 임마누엘교회에서 시무하다 2008년 6월 은퇴하고 데이빗 리 2세(David Lee Carballo)) 목사가 후임으로 시무하고 있다. 약 50명의 이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한인후예들도 있다. 아버지 리 목사는 마탄자스에서 활동하다 74년 아바나로 옮겨왔다. 할아버지 장영기(Angel Chang)는 평신도 목회자로 한국말로 예배를 인도했다. 그의 아버지 장천봉은 한국에서 멕시코로 이민 온 1세대로 감리교 교인이었다. 한인후예 중에는 쿠바에서 알아주는 화가인 알리시아 델라 캄파 박(Alicia de la Campa Pak· 42)도 있다. 최고아카데미상(Best Academy Award)을 수상하기도 한 그녀는 산 알레한드로 아카데미(San Alejandro Academy)를 졸업한 후 10년간 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촌누이동생인 안필순(86) 할머니도 아바나에 거주하고 있다. 아바나에는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할머니도 있다. 쿠바의 한인후예로 등록 된 944명 중 한글은 고사하고 한국말을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가 지난 16일부터 21일 사이 만난 한인후예 약 150명 중 한국말을 그런대로 하는 사람은 아바나에 거주하는 루이사 박(76) 할머니가 유일했다. 쿠바 땅에서 이런 할머니를 접하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자 행운이었다.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 산다는 이 할머니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우리말로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내 이름은 박쌍규. 밀양 박씨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울에서 태어나 1905년에 멕시코로 왔어요. 다시 쿠바에 왔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멕시코에서 낳고 나는 마탄자스에서 낳았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했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국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서반아어를 했어요. 한국말은 집에서 배웠어요. 디젤주유소에서 일하다 은퇴했어요. 8살에 아바나로 왔어요.” 김운영[woonyoung@koreatimes.net]